줄거리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삶을 따라갑니다. 영화는 라즐로가 이민선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바라보는 강렬한 장면으로 시작돼요. 그는 나치의 박해 속에서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조카 조피아(래피 카시디)를 헝가리에 남겨두고 홀로 뉴욕에 도착합니다. 바우하우스에서 교육받은 재능 있는 건축가였지만, 미국에서는 이민자라는 낙인 속에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죠.
라즐로는 사촌 아틸라(알레산드로 니볼라)의 가구점에서 일하며 재기를 꿈꿉니다. 하지만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은 보수적인 고객들에게 외면받고, 결국 가구점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립니다. 절망 속에서도 그는 건축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아요. 우연히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의 서재 리모델링을 맡게 되면서, 그의 천재성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재능에 매혹되어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문화 복합 센터,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설계해 달라고 의뢰하죠.
이 프로젝트는 라즐로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이자 시련의 시작입니다. 그는 유럽에 남은 아내와 조카를 미국으로 데려오고, 가족과 함께 새 삶을 꾸리려 하지만, 해리슨의 변덕과 권력은 그의 이상을 위협해요. 라즐로의 브루탈리즘 건축—노출 콘크리트와 기하학적 형태로 이루어진 단단하고 원초적인 스타일—은 시대를 앞서갔지만, 그만큼 논란을 낳습니다. 공사는 자금 부족과 반대 여론으로 중단 위기에 처하고, 라즐로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갑니다. 게다가 그의 개인적인 약점과 트라우마는 가족과의 관계마저 흔들죠.
영화는 라즐로의 30년에 걸친 여정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그립니다. 전반부는 미국에 뿌리내리려는 그의 고군분투를, 후반부는 건축가로서의 집념과 내면의 붕괴를 조명해요. 마지막 장면에서 조피아는 건축 비엔날레 무대에 서서 숙부 라즐로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가 강제수용소의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라즐로의 모호한 표정과 함께 영화는 끝나며, 그의 예술이 고통에서 비롯된 승화인지, 아니면 시오니즘의 왜곡 속에 이용된 것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감상 포인트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압도적 연기
라즐로 역의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이 영화의 심장입니다.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불안과 집념, 그리고 예술가의 고집을 섬세하게 표현해요. 특히 해리슨과의 갈등 장면이나 아내를 그리워하는 순간의 눈빛은 관객의 가슴을 울립니다. 그의 연기는 2003년 피아니스트 이후 또 한 번의 전성기를 증명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유를 보여줍니다.
브루탈리즘 건축의 시각적 구현
영화는 브루탈리즘 건축의 거칠고 단단한 아름다움을 스크린에 생생히 재현해요. 노출 콘크리트와 기하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라즐로의 설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의 트라우마와 이상을 상징하죠. 롤 크롤리의 촬영은 건물의 질감과 빛의 대비를 통해 예술적 깊이를 더하며, 건축 팬이라면 특히 매료될 거예요.
인터미션의 독창적 활용
215분 러닝타임 중 15분의 인터미션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환점을 강조하는 연출이에요.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결혼사진이 스크린에 떠오르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때, 관객은 그의 삶의 무게를 함께 느끼죠. 이 인터미션은 영화의 서사를 건축물처럼 층층이 쌓아가는 장치로, 몰입감을 배가시킵니다.
이민자 서사의 보편성
라즐로의 이야기는 헝가리 유대인에 국한되지 않아요. 낯선 땅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고투는 모든 이민자의 보편적 경험을 반영하죠. 영화는 자본주의와 계층 갈등 속에서 꿈을 쫓는 이들의 좌절과 희망을 섬세하게 그려,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대니얼 블룸버그의 음악
영화의 음악은 실험적이고 감정을 증폭시키는 요소예요. 대니얼 블룸버그의 스코어는 피아노와 신시사이저, 건설 소음을 닮은 타악기로 구성되어, 라즐로의 내면과 건축 과정의 혼란을 표현합니다. 특히 오프닝 서곡은 영화의 웅장한 분위기를 단숨에 잡아끌며,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이유를 납득하게 하죠.
해리슨과 라즐로의 긴장감
가이 피어스가 연기한 해리슨은 라즐로의 후원자이자 갈등의 중심이에요. 그의 변덕과 권력은 라즐로의 이상을 시험하며, 두 사람의 대립은 자본과 예술의 충돌을 상징하죠. 해리슨의 미소 뒤에 숨은 냉소적 태도와 라즐로의 억눌린 분노는 영화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엘리자벳과 조피아의 존재감
펄리시티 존스의 에르제벳과 래피 카시디의 조피아는 라즐로의 삶에 감정적 무게를 더해요. 에르제벳은 전쟁의 상처를 공유하며 라즐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고, 조피아는 다음 세대의 시선으로 그의 유산을 재해석하죠. 이들의 이야기는 가족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라즐로의 여정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총평
브루탈리스트는 브래디 코베 감독의 야망과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혼이 담긴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개인사를 넘어, 예술이 고통을 어떻게 승화시키는지, 이민자의 꿈이 자본주의 현실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탐구해요. 3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라즐로의 삶을 층층이 쌓아가는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브루탈리즘 건축의 시각적 웅장함이 시간을 잊게 만들죠.
영화는 브루탈리즘의 철학처럼, 라즐로의 삶을 날것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의 결점과 약점, 그리고 예술적 집념은 미화되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이는 관객에게 진솔한 감동을 선사해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조피아의 연설과 라즐로의 모호한 표정은 그의 업적이 단순한 성공담이 아님을 암시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긴 호흡과 복잡한 주제가 일부 관객에겐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고, AI 음성 보정 논란 같은 잡음이 아쉬움이에요. 하지만 이런 단점마저도 이 영화의 야심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느껴질 만큼, 작품의 완성도는 압도적입니다.
건축, 예술, 또는 이민자 서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브루탈리스트는 절대 놓쳐선 안 될 영화입니다. 극장의 큰 스크린과 풍부한 사운드로 라즐로의 건축물을 감상하며, 그의 고통과 열정에 동행해보세요. 2025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기억될 이 작품은 당신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길 거예요.